Things about me

할머니와 고추장

시골소녀 2021. 1. 18. 18:50

새해부터 일찍 일어나는 연습 하겠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뉴스를 보고있는 나에게 익숙한 뒷 번호의 전화가 울렸다.
막내이모였다.
아침 일찍부터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모말이 외할머니가 자꾸 내가 외할머니댁에 있다가 나갔다고 하는데 외할머니댁에 온 적이 있느냐는 전화였다.
웃으며 나는 할머니와 통화를 했다.
"할머니~ 내 일한다고 지금 서울을 떠난적이 없다. 저번에 내랑 통화해서 내가 갔다고 생각한거 아니가?"
"아 그래? 그른가? 내는 니를 본 것 같은데, 온적 없었나?"

벌써 세번째 전화였다.

이제 근 4-5년이 되는 것 같다. 할머니의 치매가 그때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점점 심해지시는 것 같다.
뵐 때 마다 할머니는 내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얼른 결혼하라고 하신다.
대답하고 다시 뒤돌아서면 또 나에게 내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얼른 결혼하라고 하신다.

최근에 내가 서울에서 4시간 가량 떨어진 외할머니댁을 갔다고 생각하시는 할머니는
달력에도 내가 집에 있다가 사천으로 떠났다는 글을 적어 놓으셨다고 한다.

새해 들어서 내가 할머니께 전화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게 할머니에게는 잘못 기억이 된 것인지
자꾸 내가 외할머니댁을 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어렸을때 부터 우리 할머니는 이모들, 외삼촌들, 우리엄마를 대신해서 우리 외가 손주들을 키워주셨고,
우리 외가 친척들끼리는 그래서인지 매우 친했다.

그러다 모두가 다 크고 하나 둘 할머니 댁에 있는 손주들이 적어지고, 늘 시끄러웠던 할머니댁도 조용해지면서,
할머니에게 이젠 자유를 드렸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동안
어쩌면 할머니에게는 무관심으로 비춰졌는지 할머니는 그렇게 서서히 우리도 모르게 치매가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가 눈치챘을 땐 이미 중증 치매환자가 되어 버리셨다.

할머니는 손도 크시고, 음식 솜씨도 좋으셔서
음식을 많이 해 놔도 친척들이 한번 모이면 금방 바닥이 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이젠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할머니는 더 이상 음식을 만드실 수 없다.

어렸을 때 원더우먼처럼 불 위에 냄비 두 개,
식탁에 또 다른 음식을 준비하시던, 분주히 음식을 만드시던 그런 할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나마 2년 전에 할머니가 생각나서 만들었다던 몇 개의 고추장 중 하나를
내가 비벼먹을 때 쓰겠다고 갖고온 그 고추장은..
이젠 할머니가 만들어준 마지막 고추장이 되었다.

지금도 그 고추장은 내 냉장고에 있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할머니 시그니처 고추장
그 어디에도 아직 찾지 못한 할머니의 시그니처 고추장

그 고추장이 너무 먹고 싶어서 고추장을 꺼냈다가도
남아있는 이 고추장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주저하게 된다.